Le Corbusier Masterpiece

생산자와 소비자는 어느 정도까지 합리적일 수 있을까?

툭 까놓고 말해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어느 정도까지 합리적일 수 있을까?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우리는 ‘합리성’이라는 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까?

생산자는 극도의 이익을 추구한다.

생산하는 이유가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일자리를 만들고 남는 돈은 투자하여 또다시 생산할 수가 있다. 그러니, ‘합리성’이란 말은 부차적인 것이다.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대량생산을 하거나, 소량 생산을 하더라도 가격을 높여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은 세계 어느 생산자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합리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리고 그 ‘합리성’은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생산자에게 있어 합리성은 원가를 낮춘 제품을, 가능한 이익이 많이 남게 파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소비자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이번엔 소비자로 가보자. 그들에게 ‘합리성’이란 품질 좋은 제품을 가능한 싸게 사는 것이다.

이건 마치 생산자와의 밀당과 같다. 서로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흥미롭다. 생산과 소비라는 행태가 생겨난 이래로 이러한 밀당은 계속되어져 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양자간의 ‘합리성’은 꽃피었다. ‘합리성’은 그렇게 ‘가격’과 ‘만족’ 사이에서 그 정도가 결정되었다. 어느하나가 만족되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이라 부르지 않는다. 물론, 소비자는 극단적으로 주관적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정해진 가격이라해도 느끼는 만족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이지 않은 소비가, 누군가에겐 매우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밀당 사이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합리적인 가치를 뭉개버리는 일

재미있는 건, 이러한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밀당 사이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합리적인 가치를 뭉개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생산자는 이것을 이용하여 소비자들을 끌어 들이고, 소비자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하고자하면서도 이러한 것에 걸려든다. 언제나 악당은 착한 존재를 괴롭히듯이 비합리적인 것들은 합리적인 것을 쉽사리 넘어선다. 생산자가 이를 이용하여 소비자를 끌어들인다고는 하였지만, 사실은 소비자들의 그러한 특성을 파악하여 적용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어차피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잘 아는 상황에서의 밀당은 그렇게 고도(高度)하다.

간혹, 지금 뭘하고 있는지를 모아서 나중에 펼쳐보면 이들이 뭘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ATL(X), 물 밑에 있고자 하는 것은 끝끝내 우리의 원칙이자 철학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과정에서 확보된 우리의 역량과 기록들은 우리를 물 위로 끌어 올릴 것입니다. 대항군, 병맛, 합리주의, 공리주의, 통섭, 진정성, 투명성, 헌신. 각기 다른 표현들이지만 솔직한 언어로 배너의 카피를 작성하고, 그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치부 또한 거리낌 없이 노출하며. 미래에 투자하고, 헌신하는 것만이 지난 시간동안 한결같이 지켜왔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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