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레시브한 중력

피부관리는 한번에 벼락치기로 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게 최고

책을 오랫동안 읽지를 못했다. 사실 그동안 일기도 오랫동안 쓰지 못했다. 뭔가 삶에 이상 징후가 올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독서와 일기쓰기가 오랜기간 중단되는 것이었다. 얼마전 일기를 쓰기 위해 일기장을 열었을 때, 가장 최근에 쓴 일기가 한 달 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정도면 선방이구나 싶었다. 보통 아, 너무 오래 일기를 쓰지 않았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딱 한달 정도였다. 한달이 넘어가면 일기가 아니라 글쓰기 자체를 너무 오래 쉬어서 이거 내가 글을 다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기를 거의 글쓰기 트레이닝 정도로 생각하고 쓴다.

본격적인 작품을 쓰기에 앞서서 가장 공들이는 것도 바로 이 일기쓰기다. 만약 작품을 써야하는 날이라면 나는 반드시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면서 손을 풀고, 동시에 몸과 마음, 손과 뇌를 모두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맞춰간다. 굳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나는 늦어도 한달에 한번씩은, 그 이상은 텀이 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일기를 쓴다. 손글씨로 일기를 쓰는 행위 자체가, 딱히 트레이닝이랄 게 없는 글쓰기라는 직업에 연속성과 운동성을 준다.

실제로 일기를 오랜만에 쓰게 되면, 가장 먼저 손이 안다. 나는 항상 일기를 손글씨로 쓰기 때문에, 손글씨를 쓰는 느낌과 실제로 글씨가 이쁘게 써지는지, 마음에 들게 써지는지, 필압은 적당하고 손가락에 부담은 괜찮은지 등을 체크하면서 컨디션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한 달만에 일기를 쓰게 되면 글씨가 전혀 내 마음대로 써지지 않는다. 사실 이미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작품도 쓰기가 힘이 든다. 그저 일상이나 생각을 정리해 써나가는 내 손글씨조차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무슨 공들여 쓴 작품이 제대로 나오겠는가.

얼마전에 쓴 일기도 그러했다. 필압은 힘이 너무 들어가서 손가락이 아팠고, 볼펜은 종이에 너무 깊게 박혀서 몇몇 글자는 거의 종이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글씨체도 오랜만에 쓰는 손글씨에 적응이 덜되어서 날라가듯 했다. 그날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중요한 일들을 다 끝낸 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기장을 펼친 날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고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너무 오래 일기를 쓰지 않았고, 그게 마음보다도 먼저 몸과 손이 알아차리게 되니, 스스로가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내자신이 한심했다. 운동선수로 치면 너무 오래 트레이닝을 하지 않아 조금만 뛰었는데도 숨이 차는 것을 느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늘 분량을 공책 한 바닥에 꽉 채워서 쓰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들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일기를 쓰는 것에 고파있었는지 내리 공책 세 바닥을 써 내려갔다. 한 장이 꽉 채워졌을땐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던 내 글씨가, 세 장째가 다 채워지니 비로소 조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볼펜에 힘을 많이 주지 않았지만 글씨가 뭉개지지 않았고, 잉크는 너무 들러붙지도 날라가지도 않게 적당히 착 달라붙어 있었다. 글씨체는 완벽한 BEST 는 아니었지만, 뭐 한달을 쉰 결과물 치고는 꽤 봐줄만한 글씨였다.

사실 내 인생 최고의 BEST 글씨체는 따로 있다.

과거 문예창작과에 다니면서 소설가를 지망하던 시절, 선배와 교수의 추천으로 필사에 매진을 하던 나날이 있었다. 보통은 김승옥 소설가로 시작해서, 오정희 소설가로 넘어가는 패턴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나는 딱히 닮고 싶은 문체라든가 필력같은게 없었다. 특히나 그들에게서는 없었다. 물론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은 필사하면서 아주 행복했던 기억이 나고,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인가 세 번을 필사했을 정도로 그 작품을 사랑했지만, 계속해서 그 작품만 필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오정희 작가의 소설은 다들 좋다고 하는데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좋지는 않은 노릇이었고, 신경숙이나 은희경의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다들 한사코 좋아하는데서 끝내고 그 문체를 필사씩이나 하지는 말라며 극구 말려댔었다. 난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동시에, 귀가 꽤나 얇아서 보통은 전문가나 경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실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더 이상 그들의 작품을 필사하지는 않았다. 지금와서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내가 골랐던 작품은 그래서 다들 필사로는 끝판왕이라고 지목하던 작품, 한국도 아니고 독일 작품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였다. 내 기억으로는 딱 봐도 300페이지는 거뜬히 넘어가는 작품이었고, 판본에 따라서는 400페이지도 넘어가는 작품이었다. 호기롭게 필사를 시작해서, 나는 그 필사를 마무리짓는데 1년하고도 한달이 더 걸렸다.

<향수>를 필사하면서, 나는 글씨체를 바꿨고, 펜을 잡는 방법을 바꿨으며, 필사가 때론 가장 깊은 독서의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았다. 정말 거의 매일 매일, 길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꼬박꼬박, 도저히 안 써질 때 조차도 한 페이지씩은 손글씨를 썼으니, 정말 1년이 꼬박 걸리는 하드 트레이닝이었다. 내가 <향수>의 필사를 마무리 지었을 때, 그때 옮겨적었던 향수의 마지막 30페이지 정도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씨체였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항상 그때의 그 손글씨의 느낌과 감각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기준을 그것으로 잡는다. 언제고 어느때고, 일기를 쓰면 그날의 컨디션을 알 수 있게 말이다. 본인이 본인의 컨디션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작품을 쓰려면 최고의 컨디션으로 임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럴 때면, 글쓰기는 운동과 아주 닮았다고 느낀다.

일기를 다 쓰고 난 다음이면, 난 보통 책을 읽는다.

지난번에도 일기를 쓰고 나서,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을 꺼내들고 오랜만에 꽤 깊은 독서를 했다. 문득 일기를 오랜만에 쓸 때도 그랬지만, 집중력을 가지고 깊은 독서를 한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기와 읽기는 생각보다 꽤 다른 종류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이어서, 한쪽이 컨디션이 좋다고 한쪽을 건너뛰어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작품을 쓰기 전에 하는 준비운동은 일기쓰기만이 아니라, 1시간에서 2시간 내외의 적당한 독서도 포함되었다.

나만의 루틴이나 규칙이라면, 쓰고자 하는 작품의 내용과 이 일기쓰기, 독서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일수록 좋은 것이었다. 일기는 정말 사적인 것일수록 좋았고, 독서는 정말 내가 읽고 싶은 흥미 위주의 것일수록 좋았다. 내가 사회문제를 다루고 싶다고 해서, 일기나 독서도 사회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은, 사실 읽기 시작한 것은 조금 오래 되었지만, 이제야 일기를 쓰고나서 시작한 독서로 운을 떼기 시작한 책은,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에 대한 책이었다.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라는 책이었는데, 평소 관심가지던 작가의 책이라 벼르던 차였다. 챕터가 하나 둘 넘어가고, 더 읽고 싶었지만 그날은 카페가 문을 닫는 시간이 되어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밤을 새서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이 얼마나 내게 소중했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이것은 나를 지탱해오고 나를 성장시켜준 트레이닝과 같았고, 그래서 빼먹으면 바로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었고, 또 그렇기에 막다른 길에 몰리면 나를 구원해줄 것들이었다.

재능이란 없다고 생각하고, 그저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도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시작한 글쓰기인데, 그것을 지금의 직업이 되기까지 끌고 밀어준 것은 일기쓰기와 독서 그 두 개였다. 사실 어찌 보면 그거말곤 없었다고 하는 말이 딱히 과장이 아닐수도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은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었고, 매일 쓰고, 매일 읽는다는게, 혹은 매일이 아닐지라도 어느정도 운동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그래도 나는 꾸역꾸역 열심히 할때는 열심히, 느슨히 할때는 또 느슨히 하면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해온 것이었다.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재능을 가지고 학교에 입학한 갓 스무살내기들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런 아이들이 별로 적성에 안맞는 것 같다며 학교를 떠나고, 전공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깝기도 했다. 반면 겉멋과 허세만 들어서 전혀 노력하지 않고 ‘예술가’행세를 하느라 바쁜 사람들도 많았다. 모르겠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별볼일 없는 사람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두 부류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길을 잡아준 것도 꾸준한 쓰기와 읽기였다. 난 극작을 전공한다는 학생들 중에서 꼭 읽으라는 이론서조차도 읽지 않고, 심지어는 쉐익스피어의 4대비극조차도 다 읽지 않은 학생들을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조금 힘을 내서, 아니 조금 많이 내보려고 한다. 쓰기와 읽기에 시간을 좀더 많이 투자해보려고 한다. 졸업하고 2년간, 태극권과 탱고를 거의 매일 하면서, 정말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반면에 글쓰기의 트레이닝으로 삼던 두가지를 정말 너무 소홀히했다. 아예 관둔건 아니지만 그동안은 텀이 너무 길었다. 길어야 일주일가던 일기쓰기가 거의 매번 한달에 한번을 찍게 됐으니. 독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이 너무 많아서 책장이 휠 지경이다.

여러 가지 운동과 공부를 했지만, 트레이닝은 역시 한번에 벼락치기로 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게 최고라고 본다. 다시 힘을 내서, 하루하루를 살아봐야지.

간혹, 지금 뭘하고 있는지를 모아서 나중에 펼쳐보면 이들이 뭘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ATL(X), 물 밑에 있고자 하는 것은 끝끝내 우리의 원칙이자 철학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과정에서 확보된 우리의 역량과 기록들은 우리를 물 위로 끌어 올릴 것입니다. 대항군, 병맛, 합리주의, 공리주의, 통섭, 진정성, 투명성, 헌신. 각기 다른 표현들이지만 솔직한 언어로 배너의 카피를 작성하고, 그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치부 또한 거리낌 없이 노출하며. 미래에 투자하고, 헌신하는 것만이 지난 시간동안 한결같이 지켜왔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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